nomadiclife 노 마 디 언

the blue hour

머무는 곳마다 잠시,
모든 풍경은 찰나의 정물화가 된다.

여행과 사진, 그리고 길 위에서 떠오른 소소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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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2026. 5.24
방콕

카페와 호텔

두리안을 호텔방에 들고 들어와 게걸스럽게 먹고난뒤에야 창문이 없다는 사실을 마지막날 저녁에야 알았다.

나는 호텔과 카페 공원을 돌아다니며 글을 정리했다. 두리안을 호텔방에 들고 들어와 게걸스럽게 먹고난뒤에야 창문이 없다는 사실을 마지막날 저녁에야 알았다. 우기로 접어든 거리는 미처 물이 빠지지 못하고 강물처럼 차들을 밀고 다녔다. 당일 응급실에서 시작된 여행이 이렇게 끝이 나고 있다. 길거리 음식과 로컬 음식점 거리 사진 몇 장만 남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 어느 여행보다 길게 느껴졌으며 많은 추억이 함께 한 듯하다. 그건 어쩌면 내가 그동안 묵혀뒀던 이야기들에게 이름을 붙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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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5.19
방콕

방 콕

출발 당일 아침, 세계는 예고도 없이 나를 침대 위에 묶어버렸다.

출발 당일 아침, 세계는 예고도 없이 나를 침대 위에 묶어버렸다. 극심한 허리 통증이었다. 지난 두 달간의 빡빡한 출장 일정과 쉼 없이 돌아가던 삶의 톱니바퀴가 마침내 내 육체에 청구서를 들이민 것이다. 이대로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질문은 허공에 흩어지고, 포기라는 본질적인 감정이 냄새처럼 피어올랐다. 간신히 중력을 거슬러 침대 밖으로 기어나와 응급실로 향했다. 내 생애 최초의 응급실 경험이었다. 하지만 비극적인 교통사고나 치명적인 급성 질환으로 이곳에 실려 온 타인들을 보며, 나는 기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는 동안, 다리 끝에서부터 가느다란 저림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통증으로 몰려왔다. 문을 연 약국을 찾아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동네를 뒤졌다. 단 한 곳, 늙으신 약사분이 운영하시는 약국에서 구원처럼 진통소염제와 근이완제를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다섯 시간이 넘을 비행이 아득한 심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단지 장소를 옮겨온 요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가기만 하자. 어차피 이번 여정은 무언가를 소비하고 관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 안의 비대해진 시간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위한 고독한 침잠에 가까웠으므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이정표가 아니다. 그저 나를 방해하지 않을 조용한 호텔 방, 이국적인 향기가 나는 카페, 그리고 밤이면 흐트러진 정적을 채워줄 라이브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 그것만으로도 내 해방의 조건은 충분했다. 이국의 뜨거운 태양은 내 차가운 요통을 녹여줄 것이고,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과 마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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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1.12
콘켄

콘켄여행

콘캔은 방콕과 전혀 달랐다.같은 나라,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공기의 결이 달랐다. 사람들의 얼굴도, 걸음걸이도, 말투도 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여행을 오기 전, 방콕 근교의 소도시들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구체적인 목적지는 없었다. 숙소에서 세탁기를 돌리고 기다리는 도중 딸과 함께 여행 중이라는 이스라엘 여성이 내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는 끄라비가 판타스틱했다며 꼭 가보라고 한다. 푸켓은 폭우로 엉망이라며. 예전부터 끄라비 푸켓을 가고 싶지만 혼자서 가고 싶은 마음은 일도 없었다. 망가진 발을 위로하러 들런 마사지샵에서 현지인은 나보고 태국 음식을 좋아한다면 콘캔으로 여행을 가면 좋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물가가 방콕에 비해 매우 저렴하고 음식도 맛있고 숙소도 저렴하다며 이산 콘캔 여행을 권했다. 결정의 요인중에는 생선젓깔로 만든 정통 파파야셀러드 쏨땀의 강렬한 맛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콘캔행 편도 티켓을 마사지 받는 동안 구매해 해버렸다. 얼마나 머물지는 정하지 않았다. 콘캔은 방콕과 전혀 달랐다.같은 나라,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공기의 결이 달랐다. 사람들의 얼굴도, 걸음걸이도, 말투도 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방콕은 모든 인종을 담고 있는 용광로 같은 곳이라면 이싼의 콘캔에서 외국인이라고는 드물게 보이는 서양 나이든 남자들 뿐이였다. 이 지역에서 영어는 거의 통하지 않았다. 호텔직원들과 백화점에서 일하는 점원들만이 영어를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밀크티를 주문했더니 민트티가 나왔다. 나는 웃었다. 내 발음의 문제였을 것이다. 어쩌면 내 존재 자체가, 이곳에서는 약간의 오해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로컬 사람들만이 찾아오는 지역 식당과 젊은이들이 즐긴다는 라이브펍에서 여행와서 처음으로 맥주와 브랜디 한병을 비웠다.숙소로 돌아오는 길, 어쩐지 이 도시의 공기가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무엇을 찾으러 온 걸까. 아니, 나는 정말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걸까.밤하늘엔 별 하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꽤나 평온했다. 그리고 이틀 동안 비가 계속내렸다. 텔레비젼에 모든 채널에는 시리킷 왕비를 추모하는 생중계가 모든 채널을 점령하고 있었고 나는 숙소박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에 다시 한번 취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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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1.10
차이나타운

Viagente

대체 무엇을 향해 그리 달리고, 또 걸었을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이 통증은 어쩌면 목적 상실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Viagente 여행 이틀 만에 왼발, 오른발, 양발 모두에 물집이 터져버렸다. 왼발 가락은 물집이 터진 후 껍질이 벗겨졌다. 걸음마다 통증이 올라온다. 대체 무엇을 향해 그리 달리고, 또 걸었을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이 통증은 어쩌면 목적 상실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는 치밀하게 계획된 여정을 통해서 여행할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그 계획의 족쇄를 견디지 못한다. 나는 후자에 가까웠음을 이번 여행을 통해 새삼 확인했다. 애초 내 여행은 단순했다. 러이 끄라통 축제를 보고 공원에서 되도록 아침 러닝을 할 것. 지난번 여행에서 남은 적지 않은 현지 통화를 소진하려는 계획을 포함해서. 하지만 이틀. 고작 이틀 만에 나는 계획에서 벗어나 목적 없는 방황을 시작했다. 러닝화 끈 대신 삶의 끈을 풀고 걷기 시작한 순간, 나는 비아첸토가 되었음을 느꼈다. 물집이 터지고 껍질이 벗겨져야만 비로소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것일까. 강물에 띄운 끄라통처럼, 내 아팠던 두 발은 이제 더는 목표가 아닌 순간의 발견을 향해 무작정 흘러가고 있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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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5.06
수완나폼 공항

보딩게이트는 열리고

다음을 생각하며. 여행의 여정이 처음의 계획과 어긋나 어느새 감정의 흐름으로 여정이 수렴되어갈 때가 있다.

다음을 생각하며. 여행의 여정이 처음의 계획과 어긋나 어느새 감정의 흐름으로 여정이 수렴되어갈 때가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예상치 못한 교감을 느끼게 되며 낯선 이국의 풍경은 설명할 수 없는 감동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는다. 생각해보면, 여행이라는 건 일종의 순례와도 닮아 있다. 경외롭고 신비하며 즐겁기도하지만 때론 고단하고, 고독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과정과 대면하기도 한다. 만약 이것이 순례길이라면,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어쩌면 새로운 정신이 태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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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5.05
방콕 · 짜오프라야

버스 안에서

짜오프라야 강을 지나며. 내란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태의 한국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내가 한국 국적을 가진 시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짜오프라야 강을 지나며. 내란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태의 한국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내가 한국 국적을 가진 시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여행하는 동안 현지에서 한국인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과 호감 덕분에 여행 내내 안전하고 긍정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회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주권주의 원칙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매순간 정치적 중립을 강요당하는 말단 공무원을 분노하게 하는 법관의 판결들이 지속되는 이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나는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이 과정들을 극복하고 한걸음 더 진보할 것이라고 믿는다. 19차례의 쿠데타와 왕정이 존재하는 태국을 뒤로 하고 나는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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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5.04
후아힌

후아힌 어느 리조트

"후아힌에서는 뭘 해야 해?" 치앙마이 여행을 함께 한 친구에게 물었다. "글쎄, 그냥 쉬는 데 아닌가?" 그 말이 묘하게 정확하게 들렸다.

"후아힌에서는 뭘 해야 해?" 치앙마이 여행을 함께 한 친구에게 물었다. "글쎄, 그냥 쉬는 데 아닌가?" 그 말이 묘하게 정확하게 들렸다. 사실이었다. 지금 태국 한 여름의 해변은 너무 눈부셨고, 물에 들어가기엔 태양은 지나치게 가까웠으며 열기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하루를 조용한 리조트에 묵기로 했다. 직원들은 마치 미리 입력된 매뉴얼처럼 친절했고, 로비에는 무심한 음악이 흘렀다. 그럼에도 숙박비는 비현실적으로 저렴했다. 서울의 모텔 한 방보다도 싸게, 나는 작은 평온을 샀다. 그런 종류의 행운이 자주 찾아오는 건 아니지만, 꼭 한 번은 와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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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5.04
치앙마이

올드시티에서

뚜벅뚜벅 걷다 보면, 결국엔 길가의 잡초마저 눈에 밟히게 된다.

뚜벅뚜벅 걷다 보면, 결국엔 길가의 잡초마저 눈에 밟히게 된다. 어쩌면, 이국의 길가 어딘가에서 한국의 들풀 하나쯤은 만날 수 있지 않을까—그런 기대를 품고 나는 땅만 보며 걷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낯익은 초록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릴 적 학교 앞에서 팔던 '신경초'였다. 그런데 그 옆에 똑같이 생긴, 그러나 훨씬 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잎사귀를 아무리 두드려도, 그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나무를 보며 문득 내 모습이 겹쳐졌다. 나도 한때는 잎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무감해지고, 길가에 멈춰 선 채 무엇에도 놀라지 않는 나무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이상하게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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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5.03
프라추압 키리 칸

카페 아마존에서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 끝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의 이번 여행도 조용히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 끝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의 이번 여행도 조용히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바닷바람이 느슨하게 스치는 후아힌의 한적한 카페, 카페 아마존에 앉아 나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마지막 권을 넘기고 있다. 시작은 태국 북부 치앙마이였다. 산과 향신료, 느린 걸음의 시간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밀크티 한 잔과 함께 열었다. 그 여정은 방콕을 지나, 결국 남쪽 끝 프랍츄아 키리 칸의 바닷마을에 이르렀다. 한 주라는 시간은 물리적으로는 짧았지만, 마음속 어딘가는 꽤나 깊은 자취를 남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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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5.02
후아힌

애착모자

광명역 이디야에서 커피를 마신 뒤, 인천공항행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그 모자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광명역 이디야에서 커피를 마신 뒤, 인천공항행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그 모자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10년 넘은 세월 동안 함께한 스포츠모자였다. 계절도 도시도, 사람도 수없이 바뀌는 동안 그 모자만큼은 늘 내 옆에 있었다. 잠깐 고민했다. 전화를 걸면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이젠 보내줘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난 여행 중 종종 노점이나 쇼핑몰에서 모자 코너 앞에 멈춰 서곤 했다.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없었지만, 모자 가게를 쉬이 지나쳐 가질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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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29
치앙마이

One Nimman

구글지도를 열심히 검색해 지도에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이유는, 지도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지도를 열심히 검색해 지도에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이유는, 지도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가기 때문에 그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이유'를 찾아야만 그 장소는 비로소 나의 장소가 되고, 기억 속에 저장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번 여행은 다음 여정의 길잡이가 되고,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사고가 태어나고 사라진다. 태국 내륙을 여행하며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읽는다. 복잡한 일정도, 거창한 목적도 없다. 낯선 공간에서 만화책 여러 권을 곁에 두는 일. 그것만으로도 이동은 사유가 되고, 풍경은 읽을 거리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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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사진

브롬톤
산책
태국
콘켄
후아힌
후아힌
iii

에세이

2026. 1.31
AI

언어의 굴레, AI 시대의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AI가 학습한 모든 데이터가 결국 인간이 엮어 놓은 ‘언어의 사슬’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가 언어라는 구조적 굴레 안에 갇혀 있다면, 언어를 학습하고 확률적으로 추론하며 에이전트로 활동하는 거대 언어 모델(LLM) 기반 AI의 영향력은 필연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우리는 때로 AI가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답을 내놓는다며 비웃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 역시 매일같이 정보를 왜곡하고, 주입하고, 편향된 논리로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관철하려 애쓰는 존재임을 자각해야 한다. AI의 의사표현 방식이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AI가 학습한 모든 데이터가 결국 인간이 엮어 놓은 ‘언어의 사슬’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창의성과 직관이 AI의 논리를 앞설 것이라 믿고 싶어 하지만, 예술, 법률, 학술 등 인간 지성의 최전선이라 여겨졌던 영역들은 이미 데이터의 바다를 학습한 AI에 의해 재정의되고 있으며 인간의 일자리까지 잠식하고 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굳게 믿었던 사고의 패턴들조차 AI는 너무나 정교하게 모방한다. 심지어 인간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데이터 간의 숨겨진 상관관계를 찾아내며 우리를 추월하는 모습은 이제 뉴스를 통해 일상이 된 풍경이다. 이러한 질주가 가속화될수록, 인류는 AI의 속도를 늦추고 통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놓고 격렬하게 다투게 될 것이다. 특히 삶의 중대한 의사결정권만큼은 결코 기계에 넘겨줄 수 없다는 방어 기제가 강하게 작동하리라 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불장난'은 언제나 가장 은밀하고 편리한 곳에서 잉태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효율적인 의사결정과 더 나은 분석을 위해 스스로 AI에게 더 많은 주도권을 내어줌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파멸의 속도를 높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우려하는 영화 속 비극적 장면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진 모든 사고의 기저가 언어라는 한계에 고착되어 있는 한, 그 언어를 가장 완벽하게 통계화하고 구사하는 AI에게 삶의 주도권을 점차 잠식당하는 흐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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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1.11
방콕 차이나타운
여행

여행의 목적

여행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다.

여행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다. 식욕, 성욕, 수면욕, 이 세 가지 본능의 충돌과 하모니 속에서 여행의 계획은 시작된다. 타협과 절충, 포기와 약간의 굴욕을 거치며 여행은 비로소 완성될 형태로 갖춰진다. 사람들은 근사한 호텔을 찾아 구글을 뒤지고, 후기들을 탐독하며, 맛집 리스트를 만들고, 지도를 그리며 종착지에서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꿈꾼다. 그렇게 다들 비슷한 욕망의 모양으로 여행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 욕망의 틈새에 결핍을 그려넣을 때 여행은 오히려 더 다채로워진다. 동기의 조각들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으는 동안 여행은 스스로 의미를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늙은 부모님을 모신 여행객,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 친한 친구들과의 단체여행, 그리고 전혀 모르는 커플들과의 우연한 동행까지, 각자의 이유와 사정이 얽히며 여행은 하나의 거대한 서사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은 놀라울 만큼 단순한 교훈들이다. 다들에게 무엇이였을까.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그 단순함을 하나 깨달았다.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곳은, 결코 일상의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 그러다 가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던 미슐랭 맛집들. 여행의 동력이 되었다. 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미슐랭 셰프 할머니의 식당을 찾아갔던 날, 하필 그날이 장날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게살 볶음밥을 꼭 먹어보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다음에 내가 다시 오더라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요리하고 계실 것이다. 그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이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또 다른 미슐랭 식당들도 있었지만, 많이 먹을 수는 없었다. 시간도, 내 위장도 여유가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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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8.10
잉글리쉬 페이션트
영화

'심장은 욕망의 창고다'

우연이라 불리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심장은 욕망의 창고다' 넷플릭스 구독의 본전을 뽑았다.매년 마음속으로만 ‘다시 봐야지, 다시 봐야지’ 중얼거리며 미뤄두었던 그 영화.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이 계기가 되어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이틀에 걸쳐, 천천히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감상했다. 우연이라 불리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더 이상 펼쳐보지 않을 책들이 집 안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편해져 책들을 박스에 넣어 옥상 계단 옆에 쌓아두고 있었다.어느 날 박스의 일부분이 비에 젖었고, 책들을 정리하는 도중 상자 속 곰팡이가 핀 책들 사이에서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마주쳤다.(알마시 백작 역을 맡은 랄프 파인즈가 영화속 항시 휴대하고 다녔던 책이 바로 이책이며 이 책속에 껴있는 메모 사진 그림 등등을 매개로 영화의 줄거리가 전개된다)그리고 갑자기 그 책을 보는 순간,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떠올랐다.버려질 책을 위한 작은 고사를 치르듯, 나는 영화를 마침내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예전 나는 이 영화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그렇기에 매년 다시 보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96년도 작품이라니 나는 괘 오랬동안 마음속에 묵혀놨었나보다. 머릿속에는 소설의 줄거리만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장면의 세부는 안개처럼 흐리다. 이틀 동안 여러번 끊어서 다시 마주했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심장을 조여 오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아카데미 9개 부문 수상이라는 기록이 더 이상 숫자로만 보이지 않았고, 이제는 이와 같은 작품이 제작되고 상영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언제 다시 이 영화를 또 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대신 도서관에 달려가 원작을 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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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8.03
이탈리아 여행
회상

이탈리아 기행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는 삼십세 후반(정확히 37세), 이탈리아 로마로 야반도주하듯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 기행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근무 중이었던 괴테는 삼십세 후반(정확히 37세), 이탈리아 로마로 야반도주하듯 여행을 떠났다. 내가 이탈리아, 유럽 르네상스에 관심을 줄곧 가졌었고 이에 관련한 서적과 역사서를 읽었었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이탈리아 여행을 한 것이 괴테의 나이보다 10살이 더 많은 나이였다것을 ‘이탈리아 기행’ 1권을 읽으면서 그리고 관련한 정보를 구글링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구글어스를 이용해 그가 지나쳤던 도시와 호수를 검색해보니 이백년도 전이라지먼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겠다란 생각이 든다. 시간이 멈춘듯 그가 방문한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은 그시대 그대로 박제된 듯 보였다. 10대 소년 시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책을 읽고자 시도를 했었던 기억은 난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된 동기도 구글링을 통해 또한 알게 되었다. 이제서야 갑자기라고 하기 그렇지만,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장담은 못 하겠다. 기행에서 읽었던 그의 문장의 속도에 내 자신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파우스트’란 책은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고전 읽기를 중단한 지도 꽤나 오래된 것 같다. 여행을 통해 고독해졌다는 그는 1786년 9월 3일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와 11월 1일 로마에 도착했다. 얼마나 가보고 싶었는지. 여러 도시들을 빠르게 지나쳤다는 그는 심지어 피렌체에는 3시간밖에 머물지 않았다고 이 책에서 기술한다. 세계의 수도 로마에 입성한 그의 흥분한 표정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리고 내가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했을 때, 무빙워크 위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빨리 걸어 앞으로 나아갔던 순간과 테르미니역을 향해 가는 열차 안에서 바라보았던 그래피티 가득한 낡은 로마 근교의 건물들도 함께 떠올렸다. 시스티나 대성당에서 천지창조와 아테나 학당을, 베드로 대성당에서 피에타를 우피치 박물관에서 봄의 제전과 라오콘을, 여기 사진에는 없지만 비너스의 탄생 같은 서적에서 보아왔던 그 많은 건축물과 조각 회화 작품들을 떠밀리 듯 관람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도 함께 떠올렸다. 그 당시 나의 여행은 로마로 들어가서 피렌체를 거쳐 베네치아에서 끝을 맺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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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언 프로필 사진

길을 걷고 글을 쓰는 사람.

노마디언입니다. 머무는 도시마다 사진과 짧은 글을 남깁니다.

무상함과 찰나 — 모든 풍경은 잠시 멈춘 정물화이고, 곧 흩어진다는 마음으로 기록합니다.